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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2. 22世 〉73. <부정공>여옥공휘계현묘표(汝沃公諱啓鉉墓表)
1. 문헌 목록 〉22. 22世 〉75. <광양공>상록배정부인김해김씨묘갈명(相祿配貞夫人金海金氏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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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부정공>매헌공휘충재묘갈명(梅軒公諱忠材墓碣銘)
梅軒公諱忠材墓碣銘 近世昇州人物必稱梅軒趙公君弼而識與不識俱頌慕之不休焉公以七十四齡之庚辰七月卒葬于獨店洞向癸之阪後四年其弟冕材齋族黨敏植所爲狀索墓銘于琦盖謂琦公稔也公諱忠材字君弼其字也其生則 洪陵丁卯也其系高麗大將軍璋之世也玉川府院君農隱元吉典農寺副正虔谷瑜兩世俱爼豆麗季顯祖也再傳而察訪智崙四昆季篤友相好有亭至進士時述號月川丙亂倡義曾祖在黙祖仁錫考淇亨號鳳巖妣陽川許氏暢其父也公軀幹豊偉幼有長者儀度才氣異凡文詞夙就性且孝其事生也極志體養事死也哀禮兩至母夫人沉病二十年廁牏之滌尿屎之除一不委人二弟請代亦不許處兄弟怡怡雖有未協慍怒不見於色辭從侄以十世宗冑早喪親無依公撫育之及壯甫娶婦而圽即令合産攝奉宗祀視宗婦如己婦慰籍甚厚四十有年無間言竟使長房孫爲其後其天性之篤於彛倫類此軒昻而後整其在衆中如鷄群之鶴立對之人無不肅恭寅畏而襟量宏夷言溫而氣和凡遇事不以賢知先人待衆論齊到而陳我所見故人無不心悅而信服焉是以閭里鄕黨未嘗有退有退有後言者至若事關義理不少回互而直行之己未大喪服議紛紛公作色曰不服吾君而誰爲之服即望哭而縞素人或畏劫而不恤也及玄黃改色忘情乎得喪寓志泓嶸間逍遙自適洗心有臺觀瀾有軒悠然有見山之趣於乎以公綸經器局無時無命不得少試於世竟老死鄕曲蓬蒿之下爲世道慨也文化柳鑑模女慶州李大鉉女前後配也二男炳九炳海申永休張善鎬文在璂張基善四女壻也孫男容勳後㘽勳宗勳長房生相容昌容次房生銘曰 望之傑偉即之溫良惟其盡力日用彛常世間外其何足否藏有梅在庭卒歲徜徉家有賢弟綴拾遺芳有銘無愧獨店之岡 昭陽協洽重陽月 瑞州 栗溪 鄭琦 撰 매헌공휘충재묘갈명(梅軒公諱忠材墓碣銘) 가까운 세상에 승주 인물을 반드시 매헌공 군필(君弼)을 일컬음으로 알고 모르고 간에 함께 기리고 생각함을 마지 아니하였다. 공이 七十四세로 경진년(一九四一年) 七월에 별세하여 독점동 향계지원(獨店洞向癸之原)에 안장하고 四년 뒤에 그 아우 면재(冕材)가 족당 민식(敏植)이 지은 장문을 가지고 기(琦)에게 묘명을 청하니 대개 기가 공을 잘 아는 때문이다. 공의 휘는 충재(忠材)요, 자는 군필이며, 고종(高宗) 정묘년(一八六七)에 출생하였는데 그 계보는 고려대장군 휘 장(璋)의 대에 나타나 옥천부원군 농은 원길(元吉) 전농 시부정 건곡 유(瑜) 양대가 함께 사우에 향사하니 고려 말 현조였다. 재전하여 찰방 지륜(智崙)은 四형제가 우애 독실하여 상호정자가 있고 진사 시술(時述)의 호는 월천이요,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창의하였으며, 증조 재묵(在默), 조 인석(仁錫), 고 기형(淇亨)의 호는 봉암(鳳巖)이요, 비는 양천허씨(陽川許氏) 창(暢)의 따님이다. 공이 체격이 풍성하고 장대하여 어려서 장자의 기풍이 있고 재기가 뛰어나며 문사가 일찍 진취하였고 성품이 또 효제하여 어버이를 섬기며 마음과 몸을 다 봉양하였으며 상장에는 슬픔과 예 두가지가 다 지극하였다. 모부인이 병을 알아 二十년에 요강의 세척과 분뇨 제거를 한결같이 남에게 맡기지 않고 두 아우가 대신하기를 청하되 허락 아니하였다. 형제 화락하여 혹 못마땅한 것이 있어도 노기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종질이 十대 종손으로 일찍 어버이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으니 공이 어루만져 기르고 장성하여 겨우 장가들고 죽으니 곧 합산을 하여 종사를 대신 받들고 종부를 자기 며느리 같이 보며 위로하고 어루만져 四十여년 사이 말이 없으며 마침내 장방손으로 계후하게 하니 그 천륜에 독실한 성품이 이와 같았다. 기골이 웅위하고 준수하여 여러 사람 가운데 있으면 뭇닭속에 학이 섞여 있는 것 같으니 상대한 사람이 삼가 공손하고 삼가 두려워 아니한 자가 없었으며 도량이 넓고 말이 온화하여 무릇 일을 당하여 안다고 먼저 아니하고 여러 사람 의론이 다 끝났을 때 나의 소견을 진술하니 마음으로 기뻐 아니한 사람이 없이 믿고 복종하였다. 이로써 마을과 향당에 일찍 또 물러가고 뒤에 있지 않고 말한 자 만일 일이 의리에 관계되면 조금도 가차없이 행하였다. 기미년(一九一九) 국상 때 복제에 대하여 의론이 분분하니 공이 낯빛을 고치며 말하기를, 『나의 인군을 복입지 않고 누구를 위하여 복을 입을 것인가.』 하고는 곧 북녘을 향하여 곡하고 흰 옷을 입으니 사람들이 혹 두려워하고 겁내도 근심 아니하였다. 나라가 망하자 세상의 득실의 뜻을 잊고 산수간에 뜻을 두어 노닐며 스스로 편안히 하여 세심대와 관란헌이 있어 아늑하게 산을 보는 취미가 있었다. 이에 공의 경륜과 기국으로 때에 천명이 없을 바가 아니나 조금도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향리 수풀 아래서 늙어 죽으니 세도를 위하여 한탄할 뿐이다. 문화(文化) 유감모(柳鑑模)의 딸과 경주(慶州) 이대현(李大鉉)의 딸이 그 전·후 부인이었다. 아들은 병구(炳九), 병해(炳海)요, 딸은 신영휴(申永休), 장선호(張善鎬), 문재기(文在琪), 장기선(張基善)의 처며, 손자 용훈(容勳)은 출후하고 재훈(㘽勳), 종훈(宗勳)은 큰아들 소생이요, 상용(相容), 창용(昌容)은 둘째아들 소생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바라보면 헌걸하고 웅위하며 望之傑偉 대하면 온화하고 어질도다. 即之溫良 오직 그 힘을 다한 것은 惟其盡力 날로 쓰는 윤산이로다. 日用彛常 세간밖에 世間外其 그 무엇이 착하고 불량한 것인가 何足否藏 매화가 뜰에 있어 有梅在庭 만절에 배회하였네. 卒歲徜徉 집에 어진 아우가 있어 家有賢弟 끼친 향기를 주어 모았다. 綴拾遺芳 갈명이 있어 부끄러움이 없는데 有銘無愧 독점의 산등성이네. 獨店之岡 서주율계(瑞州栗溪) 정기(鄭琦)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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